Tuesday, March 21, 2023

“코스피 78위 4조짜리 회사인데..” 창립자 가족이 찾아가도 연락처에 존재 자체도 모른다는 국내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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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하죠.

귀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신분에 따른 각종 혜택을 받는 만큼, 윤리적 의무도 다해야 한다는 뜻의 프랑스 어인데요.

실제 서양에서는 왕부터 시작해 귀족들까지 책임 정신을 가지고 외부 세력의 침약에 맞서 전쟁을 나서는 등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경주 최부잣집으로 통하는 조선시대 최진립의 경주 최씨 가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리나라의 대표가문인데요.

대대손손 가훈을 지켜가며 부를 쌓았고, 나그네나 거지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밥을 먹여주는 선행을 이어왔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의 곳간을 열어 독립운동자금 마련에 기여한 가문이기도 하죠.

현대에 들어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뜻이 기업의 CEO와 정치인들에게도 요구되는데요.

기부활동이나 자선사업, 사회환원활동 등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높은 책무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실제 적지 않은 기업들이 그러한 책무를 실천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박수를 받는데요.

그 수많은 기업인들 중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불리며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CEO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가 바로 유한양행 창업자 故 유일한 박사이죠.

유일한 박사는 일찍이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아버지 덕에 남부럽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유 박사는 개화사상에 눈을 뜨고 서구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만 9살이 되던 190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데요.

고교 시절 공부뿐 아니라 미식축구부 활동을 했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학생이었던 그는 1919년 미국 미시간 대학교를 졸업하는 등 그 시대 보기 힘든 인재로 성장하죠.

유일한 박사는 대학을 졸업한 후 사업에 관심을 쏟는데요.

중국인들이 즐겨먹는 숙주가 보관과 유통의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파악한 그는 숙주나물 통조림을 상품화하는 등 사업에 남다른 재능을 보입니다.

그렇게 ‘라초이식품회사’를 창업하며 미국에서 날로 사업가로 번창하던 그는 조국 조선으로 돌아오는데요.

우연히 간도에 들렸다 일제강점기 시대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동포와 마주친 그는 깊은 고뇌에 빠졌고 귀국을 선택하죠.

당시 운영하던 회사를 과감하게 매각하고 재산을 정리한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는데요.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전문의이었던 아내 호미리와 함께 귀국한 그는 국민 건강 향상과 기술인재 양성이라는 목표 하에 유한양행이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당시 국민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구충제, 결핵치료제, 피부연고 등 의약품 시장을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요.

이에 유일한은 미국에서 사업을 정리하고 받은 25만 달러로 미국산 의약품을 대거 사들였습니다.

사들여온 약품을 팔기 위해 한국인이 운영하는 병의원이나 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의원을 직접 운전을 해가며 영업을 하는데요.

이후 유한양행은 빠르게 성장하였고 화장품, 위생용품, 치약 등 영역을 확대해 나갑니다.

또한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 판단해 상비약부터 직접 제조에 나서는데요. 그때 개발한 상품 중 하나가 ‘안티푸라민’이죠.

유일한 박사의 조국 사랑은 회사 직원들에 대한 애정으로도 이어지는데요.

그는 1936년 대한민국 기업 최초로 전사원 주주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유일한 박사는 전사원 주주제를 시행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주식의 52%를 당시 재직 중이던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죠.

그는 또한 정경유착을 철저히 거부한 인물로도 유명한데요. 법인세를 철저히 납부했으며 정치자금 납부는 일절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직한 경영 덕에 수개월 세무조사에도 “아무리 털어도 먼지 안 나는 경우가 있다”라며 세무조사원이 혀를 내두르기도 하였죠.

뿐만 아니라 가족경영을 포기하며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대한민국 기업 최초로 전문 경영인(CEO) 제도를 실시하는데요.

그 외에도 딸과 손녀에게 묘소 주변 땅 일부와 학자금 1000만 원 정도를 준 것을 제외하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죠.

심지어 임종 직전 회사에 남은 일가친척을 모두 해고하면서 회사조차 “그분들 연락처는커녕 지금 어디서 뭐 하시는지도 모르겠다”라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1971년 사망한 후 CIA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생전 독립운동을 하였던 행적까지 추가로 밝혀졌는데요.

그의 행보를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석이 아마도 유일한 박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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